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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중심에 섰던 경북의 선비

<기획시리즈> 경북의 정체성, 대한민국의 혼이 되다 Ⅱ-2. 절의와 개혁, 경북의 선비들


경북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쉽게 말하는 수구꼴통, 배타성, 불통이 진정 경북인의 생각과 행동을 적절하게 나타내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역사적으로 경북은 그 시대를 가로지르는 정체성을 갖춰 경북뿐만 아니라 나라의 갈 길을 밝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경북이 지키고 가꾸어 온 정신적 자산은 우리나라의 민족정신으로 승화돼 반만년 역사를 이루어 왔다. 대표적인 것이 ‘화랑·선비·호국·새마을’ 정신이다. 화랑정신은 호연지기와 심신수양을 통해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됐고, 호국정신은 신라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난을 극복하는 힘이 됐다. 선비정신은 퇴계를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의 삶에 바탕을 둔 정신으로 삶에 대한 올바른 성찰과 올곧은 현실참여로 나타났다. 새마을정신은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정신으로 더불어 살아가자는 공동체 운동이자 상생의 리더십을 가리킨다. 이른바 ‘화랑·선비·호국·새마을’ 정신으로 대표되는 경북의 정체성에 대해 알아보고 이 정신이 어떻게 한민족의 민족정신으로 성장했는지에 대해 알아본다.<편집자 주>

 

경북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 있는 정몽주의 생가 전경.(사진/영천시 제공)

 

경북의 선비는 늘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했고, 그 중심에 있었다. 고려 후기 주자학(성리학)을 도입한 것도 경북의 선비 안향이며, 새로운 조선 건국에 앞장선 정도전 등 관학파도, 기울어가는 고려 왕조에 충심을 다한 절의파 정몽주, 길재 등도 모두가 경북의 선비였다. 

◆신라부터 여말선초, 충신의 계보 

경북의 선비들은 1,600년 전 신라시대부터 여말선초(麗末鮮初)까지 나라에 대한 충심을 지키며 곧은 절개를 지켜왔다. 

충신을 이야기함에 있어 신라시대 인물인 박제상부터 떠올리는 것이 순서다. ‘왜(倭)에 볼모로 가있던 동생을 구출하라’는 눌지왕의 명을 받고 천신만고 끝에 왕제(王弟) 미사흔을 신라로 탈출시키지만 정작 자신은 포로로 잡히고 만다. 

왜왕은 박제상에게 ‘신라의 신하임을 끝까지 고집하면 비참하게 죽일 것이오, 왜의 신하가 되면 큰 상까지 내릴 것’이라는 협박과 회유를 했다. 

이에 박제상은 ‘내 비록 계림(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상은 받지 않겠다’며 죽음으로 조국 신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나라에 대한 올곧은 마음은 혼돈의 시기인 고려 말, 조선 초(여말선초)에도 나타났다. 

원나라의 통치이념이었던 신유학인 주자학(성리학)을 들여온 경북 영주 출신 안향과 그의 문하 6군자 중 백이정의 학문은 이제현에게 이어졌다. 이를 이곡·이색 부자가 계승했으며, 이색의 학통은 고려 절의파이자 경북 영천 출신인 포은 정몽주에게로 이어진다. 

조선 건국의 주역인 봉화 출신 삼봉 정도전과 하륜·변계량 등 당대의 유학자들도 모두 이색의 학통이다. 정몽주와 그의 제자인 길재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으로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켰다. 이후 길재는 성리학에 기초해 후진을 양성했고, 이는 영남사림의 정신적인 토양이 됐다. 

특히 정몽주는 과거시험의 삼장(초장, 중장, 종장)에서 장원을 차지해 이름을 떨쳤고, 모친과 부친의 상에 3년간 시묘살이로 효의 표상이 됐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고려 말 충성을 다하며 조선 건국을 반대하다 선죽교에서 순절한 그는 지금도 충과 효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정몽주와 태종 이방원이 주고받은 시조 또한 유명하다. 이방원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는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에게 뜻을 함께 펴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는 ‘단심가’로 답하며 고려에 대한 충심을 보였다. 

정몽주를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같은 학통이었지만 다른 길을 간 정도전이다. 개혁을 지향한 조선 건국의 주역 정도전은 조선 개국에 동참하는 관학파를 형성했다. 그는 오늘날 탁월한 혁명가로, 당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개혁 정치가로 재조명되고 있다. 
최 부잣집이 있는 경주 교동한옥마을 전경.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으로 잘 알려진 경주 교동의 최 부잣집.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등의 가훈에서 삼대가 가기 어렵다는 부가 500여년 12대를 이어온 이유를 알 수 있다. 최부자 가문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각종 정변이나 재난이 일어나면 탐관오리와 다른 부자들은 성난 민중들의 타도 대상이었지만 영남 제일의 부자 최 부잣집은 화를 면했다고 한다. 당시 주민들이 나서서 최씨 문중을 지켜줬다. 아랫사람을 착취하고 남의 것을 욕심내어 불린 재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11대조인 최국선의 경우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빌려간 쌀을 갚지 못하자 아들이 보는 앞에서 담보문서를 모두 없애고, 죽을 쑤어 거지들을 보살피기까지 했다. 보릿고개 시절에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100석의 쌀을 나눠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고 문화예술 창달과 대학설립에 모든 재산을 기부했다. 남아있던 일부 재산도 6·25전쟁 때 피란 왔던 교수와 학자들을 위해 세운 계림대학(이후 영남대학교 합병) 설립에 보두 쏟아 부었다. 

경북 선비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상주 존애원’ 설립이라는 이웃을 향한 의료구휼 활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왜란 이후 더욱 황폐해진 백성들은 전염병과 각종 질병으로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송량, 김각, 정이홍, 윤진, 이전, 이준, 강응철, 김광두, 정경세 등 남촌(청리·외남·공성·내서 등)지역 13개 문중 24명(후일 30명)이 재물을 모아 민간의료기관인 존애원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의료 사상 처음이자 조선조 최초 사설 대중의료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존애원의 설립이념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남을 돕게 된다’이다. 

이처럼 경북 선비들의 역사 속에는 나라를 위한 굳건한 신념과 절의, 개혁,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는 따스한 마음이 녹아있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다. 경북의 선비들이 남긴 위대한 역사가 경북인 뿐만 아니라 모두가 계승해야할 정신적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이유다. 

한편, 경북은 안동, 영주, 경주, 성주, 봉화, 영양 등 23개 시·군 전역에 선비의 역사가 가장 광범위하게 남아있는 지역이다. 선조들의 뜻과 정신을 비롯해 그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택, 서원, 향교 등의 문화재는 현재 후손들과 경북도, 각 시군이 힘을 모아 지켜오고 있다. 

<참고자료-경북의 혼 한국정신의 창>




 
 (출처-경상북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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